1. 신장 기증과 함께 나무꾼이 선녀를 만나다.
내가 신장을 기증한 시기는 1996년 8월경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신청서를 작성하고 의사를 전달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청년 시절부터 정기적으로 헌혈하면서“생명 나눔”이라는 것을 깊게 생각하고 각성하는 동기가 되었고, 이를 실천하겠다는 결심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신장을 기증할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몇 가지 장애 요인은 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첫째, 30대 초반의 미혼으로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부담감,
둘째, 회사원으로 한참 열심히 일해야 할 대리급 사원이 몇 달 간 휴직을 신청하고 승인을 구해야 하는 점,
셋째,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당시에는 복부 중앙에서 왼쪽으로 약30Cm 가량을 자르고, 갈비뼈 하나를 드러낸 후 신장을 꺼내 이식하는 방식으로 8시간이 걸리는 큰 수술이었다)
또한 회복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증과 불편함이 연상 되어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때가 아니면 평생 못할 것 같아 치기 어설픈 사명감에 과감하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가족(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반대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모친께서는 "너는 노총각에 재산도 없는 놈이 몸마저 상하면 장가나 갈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며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한탄하셨다.
나는 "장기 기증을 결심한 이상, 오히려 한 살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어머니는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시다가 나중에는 자포자기 하셨는지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으로 "네 마음대로 하라!"며 등을 돌리는 것으로 묵시적 동의를 받아 신장 기증을 위해 정신 상담과 심사, 여러 가지 신체검사를 받고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장기 기증을 결심할 때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지만, 막상 이식 수술 이후 찾아온 극심한 통증과 정상으로 회복되는 몇 달 동안은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의 솔직한 심정은 너무 아파서 가끔 "내가 미쳤지" 하면서 후회도 했었다.
내 신장을 기증 받은 수혜자는 25세의 처녀였다.
8남매 중의 막내로 위로 오빠와 언니들이 7명이나 있었으나 오빠들은 올케의 반대로, 언니들은 형부의 반대로 가족에게 신장을 이식 받는 것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신장을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기약 없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혜자 가족의 사연은 수술을 마치고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수혜자의 언니 중 한 명이 찾아와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간의 사정을 자세하게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당시 총각인 내가 처녀에게 기증한다고 일부에서는 "둘 이 특별한 사이가 아닌가?"는 의심도 받았지만, 일면식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다만, 신장 기증은 역설적으로 우연치고는 드라마 같은 일생일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장기 기증자와 수혜자를 연결하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간사로 근무하고 있던 한 여성이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병문안을 온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아프던 통증도 잊어버릴 만큼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훗날 아내가 된 그 여성은 나와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회사에 다닌다는 노총각이 신장을 기증한다는 내부 정보를 듣고 간사로서 업무차 병원에 가는 길에 얼굴 한 번 보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 들어보려고 면회를 간 것이 악연(?)의 시작이었다고..
나는 장기를 기증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선물로 받은 셈이다.
신장을 기증하면서 나무꾼이 선녀를 만나는 이런 기적 같은 횡재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수지 맞은 장사를 한 셈이 되었다.
아내와 결혼 후, 나는 어머니께 가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신장 기증을 한 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이렇게 참한 색시가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 며느리로 와 주니 얼마나 고맙냐고 아내를 두둔하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는 2012년 5월에 오랜 지병인 당뇨와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내가 신장을 기증했던 병원에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셨다. 자식인 나한테 배우고 느낀 바가 많다고 하시면서 평생 자식들과 사회에 폐만 끼치고 살다가 가는데 죽어서라도 우리 사회에 작은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결혼 전부터 지병이 깊어 간병이 필요했던 시어머니를 신혼 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약 16년간 병수발 해 온 아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미야. 내가 너를 너무 고생 시켜서 미안하구나.
그리고 정말 고맙다.”
그렇게 신장을 기증한 일은 나에게 이렇게 많은 사연과 선물을 안겨준 축복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장기를 기증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축복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더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다.
2. 간을 기증한 사연, 그리고 지나온 시간의 회상
1. 간 기증에 대한 사연과 기억
2013년 1월 매서운 겨울 추위가 유난 했던 계절에 나는 간을 기증했다.
신장을 기증한 지 17년 만에 간을 기증하기로 한 것으로 신장 기증 당시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모친이 돌아가신 지 7개월 만이다.
신장을 기증할 때와 같이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간을 기증하겠다고 의사를 전달하고 신속한 절차를 요청했다.
장기 기증에 대해서는 한 번의 전과(?)가 있어 고민은 길지 않았고 간을 기증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적절한 시기를 보고 있었던 지라 실행으로 옮기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모친이 살아 계실 때 다시 간을 기증하겠다고 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시기를 미루고 있었을 뿐이다.
장기 기증은 가족의 동의가 필수 요건인데 이번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람인 아내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간사로 근무했던 경력이 있어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고 한편으로 반대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라 동의는 하되 아내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이란 언론이 취재 요청을 경우, 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헌혈도 많이 하고, 신장과 간까지 기증한다면 언론사의 취재가 따를 수 있고, 언론을 통해 나와 가족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내의 조건을 흔쾌하게 수용하였고 이후 장기 기증에 필요한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참고로 아내와의 약속은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했다. 간을 기증한 지 몇 달이 지난 시점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출입하는 경제신문 기자가 내부 정보를 듣고 나에게 전화로 취재를 요청하기에 보도를 원하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답변했는데 결국 기사화 되었다)
간 기증을 위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부와의 면담과 절차는 비교적 수월했지만, 서울아산병원에서의 면담과 심사, 최신 의료 장비를 이용한 신체검사를 거치면서 신장을 기증할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까다롭고 엄격한 과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신체검사의 결과는 간을 기증해도 될 만큼 간 상태가 양호했고 사이즈도 커서 기증에 무리가 없다는 판정을 받고 입원 날짜를 정했다.
이번 간 기증을 결정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직장에 있었다.
당시 대기업 임원으로서 문제 사업장의 해결사 역할을 맡고 있었고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현안이 있어서 간 기증을 하겠다고 휴직을 신청하고 승낙을 구하는 것은 정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작심하고 용기를 내서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으며 회사는 최대한 빨리 업무에 복귀할 것과 시급한 현안은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고 입원하는 조건으로 승낙을 받았다.
이제는 지난 일이라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 회사의 승낙이 없다면 나는 사표를 내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나는 회사의 배려에 보답하고자 업무 공백을 최소화 하고자 설날 명절 연휴 기간에 수술 일정을 잡았고 입원에서 퇴원까지 약 2주일을 사용한 후 곧바로 회사로 출근해 업무를 시작했다.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 있던 며칠간은 잠을 이룰 수 없는 통증과 후유증이 뒤따랐다. 가슴에서 아랫배로 이어지는 L형 수술 자국이 만만치 않은 수술이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신장을 기증한 경험이 있음에도 회복과정에서 통증과 불편함은 여전히 힘든 시간이었다.
나에게 간을 이식 받은 수혜자는 4살의 어린 소녀였다.
부모는 모두 30대 젊은 부부였고 딸에게 간을 기증하려고 검사를 받았으나 부부 모두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경우로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순수 기증자가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난 후 수혜자 부모는 나를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고 의사를 물어 왔으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 만남 그 자체를 피하고 싶다는 의도가 아니라 어린 딸의 생명을 살린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내 나름의 배려였다.
장기 기증의 경우 기증자와 수혜자의 교류는 법적, 제도적으로 제한되거나 하거나 조심스러워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인적 교류는 권장할 일은 아닐지 모르나 지나치게 우려할 일도 아닌 듯하다.
간 기증 이후 회사 생활에는 변화가 있었다.
곡절과 사연은 많지만 결과적으로 상승 탄력을 받아 2013년 그룹 계열사 대표이사로 선임되었고 약 9년간 회사의 대표와 고문을 거쳐 2022년 3월 말 퇴직했다.
1979년 5월 낡고 열악한 공장에서 소년 근로자로 시작해 2022년 3월 말 퇴직 때까지 43년 11개월간 크고 작은 직장에서 일했으며 이 중 19년은 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했으니 급여 생활자로서는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직장을 퇴직한 이후에는 민간 기업보다 공공의 영역에서 일하거나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여의치 못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다.
현재는 처가에서 소유한 작은 유통업(산업용 소모성 부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당 분야 경험도 없어 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가족으로서 도리를 다한다는 자세로 잠시 도우려 했는데 지금까지 눌러 앉아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또한 하늘의 섭리로 생각하고 떠날 때까지 일에 더 집중하고자 한다.
2. 지난날의 회상과 고백, 그리고 다짐
60대를 맞이하면서 허물 많고 모순 속에서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남은 생의 다짐을 더 해 본다.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직장인으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꿈꾸던 직업은 아니었다.
직장인으로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주류가 주류 사회를 갈망하며 가난이라는 터널을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세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주류 사회를 상징하는“돈과 명예”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과 명예를 쫓는 속물 덩어리는 아니지만 먹고사는“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적 성공과 야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타인으로부터 나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잡을 수 없는 그림자를 쫓으며 살아온 세월”이었고 결과에만 집중한 채, 과정은 소홀히 해온 부끄러운 시간이었다고 반성해 본다.
비록 비주류로 살아온 허물 많은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비행기의 양 날개처럼 두 개의 축이 있었다.
첫 째는 가난이요, 둘째는 신앙이었다.
가난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 결핍이 절박함을 낳았고, 결핍과 절박함은 수 많은 난관을 극복해 갈 수 있는 의지와 생존에 필요한 근성을 길러주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타고난 배경이나 뛰어난 스펙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로 가득 찬 문제와 가혹한 시련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는가 하는“자세와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난은 주어진 환경에 짓눌려 비관하고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사람을 빨리 철 들게 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놀라운 저력이 생긴다.
신앙은“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 풍진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 하는 삶의 근원적 질문에 가르침과 해답을 찾는 등불이 되어 주었고“선과 악”,“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속성을 모두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성찰하고 거듭나야 하는지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신앙은 때때로 세상의 고단함에 지쳐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지켜준 버팀목이자 정신적 피난처였다.
한 마디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가난과 신앙”이다.
남은 여생은 세속적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성공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인생에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을 억제하며,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선명하게 함으로써 가치 지향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여정이 되기를 구도자의 마음가짐으로 기도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지금까지 살아 온 세월과 축적과 경험이 스승이 될 것을 믿는다. 그동안 가족과 친구, 많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분에 넘치는 과분한 사랑과 배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도 겸손하게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자세로 살아가고자 한다.
끝으로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매우 도전적이고 무모한 남편을 만나 일반적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사려 깊고 현명하게 대응하면서도 정성을 다해 내조 해 온 것에 대해 인생의 동반자로서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3. 헌혈하는 이유와 지속하는 힘
2024년 5월 기준, 나의 헌혈 횟수는 대한적십자사 공식기록으로 649회(전혈 64회, 혈소판 53회, 혈장 532회)이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이보다 2회 많은 651회이다.
기록에서 삭제된 첫 번째 사건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소년근로자로 생활하던 1979년~1980년경으로 한 달에 2번 쉬던 휴일(일요일)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가 서울역 앞에 상시 주차되어 있던 헌혈차 안에서였다. 당시 헌혈 할 수 있는 나이에 미달했지만 헌혈 할 수 있는 나이라고 기록하고 헌혈 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렇게도 헌혈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볼수록 부끄럽고 잘못된 행동으로 마음 한구석에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내가 지금 좋은 일 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치기 어린 마음과 공명심으로 용기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번째 사라진 기록은 1985년부터 2개월에 한 번 정기적으로 전혈을 했 왔었는데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지만 1980년대 후반에 헌혈 하는 일자에 대한 착오로 2개월이 경과 되지 않은 상태에서 헌혈 한 것이 나중에 확인돼 공식 기록에서는 삭제되었다.
내가 이렇게 헌혈의 횟수와 세부 내용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최근 스마트폰 앱 ⌜레드커넥트⌟를 설치하면 헌혈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기록, 검사 결과, 헌혈 예약과 예정 일자 등을 자동으로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헌혈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연령 제한이 있는 만 69세까지 앞으로 10년은 더 할 수 있으니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950회 내외가 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만 헌혈 연령을 제한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헌혈을 해 온 사람으로서 의학적으로 근거가 분명한 것인지, 근거가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 달리 생각하면“이제 나이가 많으니 그만 하세요.”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건강 수명도 다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헌혈을 정기적으로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첫 번째 헌혈이 있던 때로부터 약 6년이 경과 한 1985년부터 이다.
나의 청년 시절은 다섯 식구의 가장으로 생업과 학업을 병행하던 고달프고 힘겨운 생활 있었다. 열악했던 일터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CBS 기독교방송의“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훌륭한 신앙인의 간증에 큰 감동과 은혜를 받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부끄럽고 흠결이 많은 사람이지만 가치 지향적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각오는 흔들리지 않고 살아 있어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써 헌혈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돈을 기부하는 것도, 시간을 내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내가 꾸준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헌혈이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헌혈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은 용기보다 지속하려는 의지와 열정, 그리고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헌혈은 우리 사회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연민, 연대 의식에서 출발한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생명을 나누는 선행이다.
헌혈은 남에게 돋보이거나 주목 받는 기부 행위는 아니지만 꾸준한 실천이 뒤따르려면 항상 자신의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자기 관리와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헌혈하는 날을 기준으로 하루나 이틀 전부터는 술이나 고기와 같이 몸에 해가 되거나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 최상의 상태로 몸을 만들어 헌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헌혈을 위해 자기만의 생활 규칙을 정하고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내 피를 수혈 받는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다는 사명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헌혈은 건강한 사람에게만 부여된 선택적 기회이자 축복이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헌혈하라고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건강하다는 것은 신의 선물이며, 피를 나누는 실천은 스스로 복을 짓는 것으로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보다 복을 지어 나누는 사람이 더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믿는다.
헌혈은 그 자체로 헌혈자에게 자긍심이 생기는 일이지만 혈액 검사를 통해 간단한 건강 상태도 확인 받고 혈액 순환(조혈작용)이 촉진되는 부수적 효과도 있으니 일석이조 또는 일석삼조라고 할 수 있다.
헌혈자에게는“생명의 나눔”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고 자기 관리를 하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와 함께 건전한 생활 습관을 갖게 하는 이점도 생긴다.
다만 해소되지 않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헌혈을 아무리 많이 한 사람도 헌혈할 때마다 굵은 바늘이 팔뚝을 파고들 때 느끼는 긴장감과 통증에 대한 심리적 부담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살짝 돌려 외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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